한국인 원폭피해자 2~3세 후손 적극적인 지원 필요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갔다가 히로시마(島),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원폭에 의해 많은 조선인들이 죽고, 일부 피폭된 조선인들은 목숨만 연명하고 고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변의 무지로 인한 오해와 편견뿐이었다. 피폭병은 전염병이라며 주변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친지들조차 기피하며 냉대하였고, 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으로 죽어 갔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피폭자들을 더욱 고통으로 내 몰았고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웠다. 이러한 주변의 무관심 속에 설상가상으로 1965년에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韓日協定)을 통해 식민지기의 피해에 대한 국가보상권리를 포기하는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일본에서는 원폭피해자 문제는 일찍부터 사회문제화 되었지만, 한국인 피폭자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에야 사회문제로서 대두되고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1967년에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설립되면서 원폭피해자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0년 대 본격적으로 한일 양국에서 피해자 구호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전반적으로 원폭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 현실때문에 피폭자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한국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이 할 수 있었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이 공산화를 막아주었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원조를 해 준 고마운 우방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와 피폭자들은 원폭투하를 무자비한 인류의 파괴라는 최소한의 비판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폭자가 그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많은 침략전쟁의 책임이 있는 일본은 전범국가라는 역사적 과오를 망각한 채, 단지 자신들이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만을 부각시켜 왔다. 이 같은 일본정부의 피해의식은 피폭된 한국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치하는 원인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됨으로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국정부의 그 동안의 무관심과 소외된 전쟁피해자에 대한 책임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지금까지 소수의 소외된 그룹으로만 치부되어 왔던 문제가 인권문제로서 서서히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일협정의 문제점도 제기되면서 일본의 역사청산운동과 관련하여 양국의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2011년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청구권 소멸 여하에 대하여 양국간의 의견을 달리 했다. 헌법재판소는 원폭피해자의 피해구제의 분쟁을 해결하지 않는 것은 헌법위반이라고 판결하고 한국정부가 외교적으로 노력을 하도록 판결하였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민간단체에서 오랫동안 긴밀한 협력과 연대로 양국의 교류협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양국의 민간단체의 협조아래 이홍현과 유족 3인이 오사카부(大阪府) 상대로 최고 재판소 소송에서 승소를 하여 재외피폭자에게 대한 원폭의료법이 완전히 평등 적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16년 5월 19일에는 한국에서도 피폭자 지원법안이 제정되어 피폭자의 등록, 실태조사, 의료지원을 실시하는 것 이외에 희생자의 추도사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피폭자 건강수첩을 소유해 의료비 보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의료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그리고 원폭 피해자의 후손들 중에 유전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2~3세들의 피해 인정과 지원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대량살상무기 원폭 반인류적 행위
전체 원폭피해자의 10% 조선인

정부는 원폭 피해자의 2~3세들에도 관심과 원호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폭 후손들은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병든 몸까지 대물림 되는 고통을 겪어왔다. 피폭에 의한 질환은 원폭피해자 문제의 핵심으로, 이 문제를 인류사회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사안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가 권력은 평화의 미명하에 인류의 불미스런 과거를 봉합해 국익을 우선 도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왔다. 원폭 피해자 문제를 개인적 불행을 넘어 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보고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수행한 전범국가인데도 반성은커녕, 유일한 전쟁 피폭국이라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제국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잔인성으로 연결되는 난징(南京)대학살과 태평양전쟁의 무자비한 공격성이 핵전쟁을 불러들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원폭에 대해서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파시즘 침략자와 맞서 싸운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핵무기 사용을 정당화해 왔다. 많은 과학자들은 트루먼(Harry S. Truman 재임기간(1945.4.12~1953.1.20.) 대통령에게 가공할 만한 대량살상 무기인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말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그럼에도 도쿄(東京)대공습(1945.3.9.~10)으로 초토화되어 선택지가 항복만 남은 상태에서, 일본 2개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조선인을 포함한 엄청난 민간인 대량살상을 야기시켰다.

미국이 주장하는 원폭의 정당성에서 과연 원폭투하가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원폭투하가 수많은 미군 병사와 일본인 생명을 구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필요가 있겠다.

미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대량살상 무기개발과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실험 사용한 반인류적인 살상을 저지른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은 국제적으로 부도덕하게 전후 소련의 개입을 우려해 강압외교의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정치적으로도 이용했고, 오늘날까지 각국의 핵무기 개발을 부축인 것에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박인식
                                                                            전 대학교수/ 일본학술박사

저작권자 © 이천뉴스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